아티스트가 노랫말에 담아낸 감정과 주제를 들여다보다
2025-06-15 • 이연지
아티스트가 노랫말에 담아낸 감정과 주제를 들여다보다
2025-06-15 • 이연지
여러분은 음악을 감상할 때 사운드와 가사 중 어디에 더욱 집중하시나요? 감각적인 연주나 독창적인 사운드 디자인에서 감동을 느끼는 리스너들이 있는가 하면, 노랫말에 담긴 정서와 메시지에 공감하며 음악을 향유하는 리스너들도 있습니다.
가사는 음악이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가 되어줍니다. 특히, 인디 아티스트들을 중심으로 한 자체 창작 중심의 음악인들의 노래에는 그들만의 고유한 정서와 주제 의식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단순한 리스너를 팬으로 이끄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번 아티클에서는 한국의 인디 음악과 명반에 담긴 노랫말에 주목해보려 합니다. 각 아티스트가 어떤 감정과 주제를 담아왔는지를 데이터 기반으로 분석하고, 비슷한 정서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아티스트들을 찾거나 특정 주제를 깊게 다룬 앨범들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분석 대상은 최근 3년간 주요 락 페스티벌에 출연한 인디 뮤지션들과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된 아티스트들을 위주로 추려서 진행합니다.
가사에 담긴 감정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기 위해 본 분석에서는 Valence–Arousal 모델을 도입합니다. Valence–Arousal 모델은 감정 심리학 및 감성 컴퓨팅 분야에서 널리 사용되는 이론으로, 감정을 두 가지 축으로 나누어 표현합니다.
해당 모델을 도입함으로써 각 노랫말의 정서를 2차원 평면 공간에 시각화할 수 있게되어, 아티스트의 감정 분포를 입체적, 시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슬픔, 우울감을 위주로 노래한 아티스트들
대표적으로 언니네이발관, 브로콜리너마저, 델리스파이스가 있었습니다. 또한, 유사한 정서로 묘한 연대감을 형성하며 일부 팬들 사이에서 “쏜못넬”로 같이 언급되기도 했었던 쏜애플, 못, 넬 역시 같은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 예시 곡 들어보기 🎵
언니네 이발관 - 의외의 사실
난 더는 여기에 있을 수가 없어 어디든지 뛰쳐가야만 했지 누군가와 만나 밤을 지새워도 초라한 기분이 가시질 않네
못 - 날개
우린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더 높은 곳으로만 날았지 처음 보는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슬펐지
델리 스파이스 - 1231
나 떠나며 당신을 저주할 수 있다면 아마 넌 조금은 덜 고통스러울 것만 같아서 말야 눈물을 흘리며 날 끝없이 바라봤어 그래 날 증오해 날 죽이고 싶어
분노, 혼란을 위주로 노래한 아티스트들
예상대로 익스트림/헤비 사운드에 기반한 밴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예시로는 Remnants of the Fallen, 매써드와 같은 메탈 밴드와 뉴메탈 기반 하이브리드 락 밴드인 뉴클리어 이디엇츠가 있습니다.
🎵 예시 곡 들어보기 🎵
Remnants of the Fallen - Hate And Carrion
Mouths spitting hate and carrion Our trinity decays No more living the life of forgiveness
Resist the words that have clouded our senses
매써드 - Deadliest Warrior
The earth roars the sky trembles Scream and cries fill the world
No hope in the fallen world No mercy in the fallen world
즐거움, 행복을 주로 노래한 아티스트들
긍정적인 정서를 위주로 노래한 아티스트에는 신스 사운드 중심의 글렌체크와 ADOY, 그리고 다양한 장르를 융합한 실험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는 카디가 있었습니다. 장르에는 차이가 있지만 세 아티스트 모두 영문 가사 중심으로 작사를 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정서를 복합적으로 다룬 아티스트들
90년대 말 부터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국 인디록 씬의 주축을 이룬 노브레인, 크라잉넛 그리고 체리필터는 각자의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희노애락을 모두 아우르는 표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만, 이들의 음악에 담긴 주제의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으며, 이에 대한 분석은 아래에서 자세히 다뤄볼 예정입니다.
🎵 예시 곡 들어보기 🎵
체리필터 - Happy Day
난 내가 말야 스무살 쯤엔 요절할 천재일 줄만 알고 어릴 땐 말야 모든게 다 간단하다 믿었지
이제 나는 딸기향 해열제 같은 환상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징그러운 일상에 불을 지르고 어디론가 도망갈까
정서가 가사의 외피라면, 주제는 그 내면입니다. 같은 정서를 공유하더라도, 어떤 주제를 통해 이를 표현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가사에 담긴 감정의 층위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각 가사가 어떤 주제를 다뤘는지를 분류해 보고자합니다.
이를 위해, 수집한 전체 가사 약 20,000건을 요약한 뒤 요약본을 바탕으로 텍스트 군집화를 수행했습니다. 가사의 요약은 언어 모델을 활용하여 자동으로 생성하였으며, 군집의 개수는 점진적으로 클러스터 개수를 조정해가며 가장 직관적인 분류 결과를 보인 8개 군집을 선택하였습니다. 최종 선정된 8개의 군집은 각각 다음과 같은 주제적 특징을 중심으로 나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앞선 정서 분석(Valence-Arousal)에서는 비슷한 정서 분포를 보였던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이 주제 분석에서는 차이를 보였습니다. 노브레인의 긍정적 정서는 ‘희망, 의지’ 와 관련된 메시지를 위주로 나타난 반면, 크라잉넛의 긍정은 ‘즐거움, 자유’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노브레인 - 청춘은 불꽃이어라
칠흙같은 어둠속을 허우적대며 무엇을 찾기위해 발버둥 치는가
후회란건 정말 쓸모없는 것 되찾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지 젊은 영혼에 불을 당겨라 청춘은 불꽃이어라
노브레인 - 불타는 젊음
고통이 지척에 있다한들 어이해 멈출 수 있으랴 불타는 젊음의 열기만이 그대를 증거 하노라
크라잉넛 - 좋지 아니한가
그래도 너는 좋지 아니한가 바람에 흐를 세월 속에 우리 같이 있지 않나
이렇게 우린 웃기지 않는가 울고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없는 세상에 우린 태어났으니까
크라잉넛 - 서커스 매직 유랑단
마음대로 춤을 추며 떠들어보세요 어차피 우리에겐 내일은 없다 떠돌이 인생역전 같이 가보세 외로운 당신의 친구되겠소
스트리밍 시대 도래 이후 싱글 중심의 음악 소비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앨범 단위로 음악을 감상하며 그 안에 담긴 서사와 주제 흐름(소위 ‘유기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스너들도 많습니다. 이번 분석에서는 각 앨범이 얼마나 일관된 주제를 담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아 유기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보았으며, 각 주제별로 해당 정서가 높은 비율로 담겨져있는 앨범들을 확인해보았습니다.
그리움, 상실을 주로 다룬 작품은 조용하고 깊은 음색이 특징인 80~90년대 작품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움을 주로 다룬 아티스트로는 동물원, 장필순, 부활이 있었으며 외로움과 상실감에서는 신촌블루스, 김수철 그리고 언니네 이발관의 앨범이 자주 나타났습니다.
사랑은 활동연도와 상관없이 다양한 아티스트가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며, 특히 검정치마의 TEAM BABY는 해당 정서를 상대적으로 높은 비율로 담아냈습니다. 단, 혼란스럽고 불안한 사랑을 주제로한 앨범은 다른 정서에 비해 단독으로 높은 비율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해당 정서가 외로움,상실감과 함께 복합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었기 떄문입니다.
희망과 저항은 서로 밀접하게 맞물린 주제이며, 두 정서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두 주제를 잦은 빈도로 다룬 아티스트로는 대표적으로 안치환과 노브레인이 있었습니다.
반면, 혼란스럽고 불안한 자아에 대한 주제는 메탈이나 헤비사운드 계열 밴드의 앨범에서 높은 비율로 명확하게 다뤄졌습니다. 특히 메써드와 크래시와 같은 밴드는 해당 정서를 매우 밀도 높게 담아낸 것이 나타났습니다.
즐거움,자유,행복 같은 밝은 정서를 중심으로 한 앨범은 이상은, 산울림, 크라잉넛 등의 아티스트에게서 자주 다뤄졌습니다. 특히, 추다혜차지스의 “오늘밤 당산나무 아래서”에서는 해당 정서가 높은 빈도로 나타났습니다.
음악의 노랫말은 단순한 구성 요소를 넘어, 아티스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과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이번 분석을 통해 한국 인디 아티스트들의 노랫말에 담긴 주제와 정서를 데이터적으로 가볍게 살펴보았습니다. 특정 감정선이나 주제를 중심으로 가사를 풀어내는 아티스트들의 면모도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제한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행되어 한국 인디 음악의 가사를 폭넓게 조망할 수는 없었지만, 가볍게 읽어보시면서 좋아했던 가사에 담긴 이야기나 감정선을 한 번쯤 다시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